배움터와 놀이터

from 늘인글 , 2002.12.06

상데쥬 2004. 12. 10. 01:25

대구에서 물건 정리를 하게 되면 적지 않은 프린트물을 보게 된다.

예전에 하드디스크 하나가 통째로 날라간 뒤로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다운받아놓은 사진이나 그림, 동영상이 들은 쪽이었다.) 약 몇년, 즉 컴퓨터에서 인터넷의 공간으로 글쓰는 쪽을 바꾸기 전의 기간 동안, 글을 쓸때면 반드시 출력을 하곤 했었고, 그것이 상당량이었던 것이다.

그 양이 얼마나 많았나 하면.. 당시 내가 산 주요 문방구가 파일케이스와 속지와 쫄대였었다. 속지에 한편씩 집어넣어서 철해보다가(그러면 속 내용을 볼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스태플러를 찍어서 구멍을 뚫어보기도 하고(볼품이 없었다.), 마침내는 몇 편씩 묶어서 양쪽으로 OHP를 대고 쫄대로 묶어 3소켓짜리 모닝글로리 파일함에 담아놓았었는데, 그렇게 작업하여 세워둔 파일철이 어느덧 책장 한칸을 가득 채웠었고, 그것은 너무나 당당해 보였다.

그러나 쫄대의 힘은 풀리고, 표지로 대어놓은 OHP는 너무나 매끄러우며. 특별히 스태플러로 찍어두지도 않은 종이들은 한번씩 꺼내볼 때마다 풀풀 날리며, 마지막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관심은 옮겨가기에, 그들 옛 글들은 다시금 종이무더기가 되어서 아무렇게나 철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95년도엔 편지, 96년도에는 편지성 글, 97년도에는 오직 수필 등등등. 편지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는데, 96년도부터의 첫 프린트물에는 글쓴 날짜가 맨 뒷장, 혹은 맨 앞에 약간의 덧말과 함께 적혀 있었다.

그 전부는 아니지만 그 수많은 글들을 몇 개는 차분히, 몇 개는 살짝 넘겨보면서 나름대로 머릿속에서 정리를 하였다. 지금까지 글은 약간씩 달라져 왔구나.. 세단계 정도로 나누어지겠구나, 맨 처음은 94년도부터 97년 여름 정도까지, 2단계는 그로부터 2000년 또한 여름까지.. 그후 지금까지 또 글의 느낌이 다르구나.. 하고 말이다.

지금 와서 97, 96, 95때의 글을 보면, (94년도에는 컴퓨터가 없었고, 손으로 직접 연습장에 적었었는데, 방구석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글씨를 알아보기도 힘들것 같아서 찾지는 않는다.) 이런 글을 썼던가 하고 나 스스로도 놀라곤 한다. 문장 자체는 상당히 어렸었지만, 그 문체나, 서술 방식이나, 묘사라던가 비유, 그리고 생각의 흐름 등은 지금의 나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뭐랄까, 한없이 이어지는 꿈의 흐름이랄까. 그러한 느낌이 들었었다.

97, 98때의 글들과, 그 이후의 글들은 컴퓨터에 저장시킨 글들보다는 통신과 인터넷에 올린 글이 더 많았었다. 그 글들 역시 지금의 나와는 다른 입김을 내뿜고 있다. 서술을 이어보자면 흘러가는 꿈을 하나씩 하나씩 건져올려서 던진 창이나 화살이랄까, 오직 하나로만 나아가고 뒤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에 비하자면, 지금의 글은 상당히 둥그스레한 편이다.

밀가루 반죽을 던져 올려 피자팬을 만드는 것처럼,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나의 생각들이 그대로 투영되다가 어느덧 조그만 조그만 기복들이 떨어져 나가고 이제 일정한 모양으로 남았다고나 할까, 그 엄청났던 마음의 단편들은 이제는 더이상 글에 비치지 않고 가슴을 흔들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나는 의식의 넘치는 것을 토할 곳을 글쓰는 데에서 찾았는지도 모른다. (원래 그런 사람이 많다.) 그것을 마치 깃털처럼 날려보내자, 이윽고 그 높이 떠 있던 이상은 땅으로 내려와 대지에 반쯤 박혀 한 덩어리로 된 것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지금의 나의 글에서는 예전의 재미는 나지 않는다. 고매하고 높은 선도 없으며, 무한한 악의 가능성도 나오지 않는다. 나의 세계의 모든 것이 노쇠한 우주처럼, 팽창을 멈추고 수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 떄문에 나는 지난 옛글을 좋아한다. 그 정리되지 않은 엄청난 사고의 무더기 속에 다시 마음을 던져넣어, 보고 싶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