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자랑하자는 뜻도 있겠지만, 고등학교 문학 참고서는 아직 나의 책상 위 책꽂이, 그러니까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그러므로 가장 중요하거나 필요한 것들로만 채워져 있는 책꽂이, 뭐 어떤 이들은 장식을 위해서는 책을 놓아선 안된다고 하는 그런 곳에 꽂혀 있다. 생각이 잘 안 풀리거나,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을 때, 혹은 분위기 전환을 할 때에는 일본어 책을 꺼내듯, 이탈리아어 책을 찾아보듯, 약간 몸을 굽혀 멀리 꽂혀 있는 프린트물을 찾듯, 이 문학책을 편다. 가장 간단하게 만든 내 주변의 것들 중, 형태는 다르지만 글쓰는 형태는 같은 노트북과 함께, 기억을 되새겨주는 몇 안되는 것이기도 하다.
지학사에서 나온 이 문학책은, 물론 동사의 문학 교과서를 위한 것이지만, 참고서인 만큼 상당히 많은 양의 보충 자료를 담고 있다. 상권은 조선 말기까지의 문학 작품을, 하권은 일제 치하기부터 80년대 전까지의 문학을 다루고 있는데, 당시 이 합본 참고서의 가격은 일만원을 넘지 않았다. 담겨 있는 글자수와 페이지 수로는 결코 지금의 법서들에 밀리지 않는데 말이다.
나는 공부에 대한 흥미보다는 문학 작품에 대한, 역사에 대한, 그리고 우리말에 대한 흥미로 문학을 접했고, 그렇기에 흥미를 잃지 않고 지금껏 자주 찾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특별히 공부를 위해, 특별히 깨닫기 위해 찾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프로, 전문가들이 가질 수 있는 지식으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그렇기에 볼 때마다 새로운 인상, 새로운 지식,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육당 최남선이 최초의 신체시를 지은 것이 1908년인데, 그의 생년월일은 1890년, 단순 계산으로도 19세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지었다는 사실이 튀어 나온다. 그리고 1919년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때에 그의 나이는 30세, 만으로는 29세에 불과했다는 것도 알게 되는 것이고, 나이가 30을 바라보는 지금에 와서는 사뭇 놀라게 되고 조금이나마 탄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릴 적 '해에게서 소년에게' - 나의 동시대 사람들은 거의 다 잊어먹었으리라 하는 말이지만, 여기서 해는 바다를 말한다. 바다 해자를 쓰는 것이다. - 를 보았을 때는, 김억, 주요한, 나아가서 김소월의 깔끔한 말에 도취되어 있던 때라 너무나도 버겁고 우스꽝스러운 형태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렇지만 지금. 근 10년이 지난 뒤에 보니, 이 시는 우주를 안은 듯 넓디 넓은 시인의 마음을 전해 주는 듯, 나의 지금 마음으로는 따라가기 어려운 위치에 자리해 있다.
그것은 내가 이제야 남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정도에 오른 동시에, 과거에 강했던 나의 감정 또한 기르고 닦지 않아 스러져 버렸음을 또한 의미한다.
1890년에 태어나 1910년 합방을 보고, 1919년 독립 선언서를 기초하며, 차후 변절에 이르기까지, 최남선의 삶은 격동기와 이어져 있고, 그는 역사 안의 중요한 하나하나의 장면에 자기의 이름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좋던 싫던, 그것이 옳던 그르던, 그 또한 세계의 흐름에 노를 저은 하나의 인물이었던 것임을, 그 또한 '행동이 자기를 더럽히지 않음을 확신했던' 사람임을 이 시 하나로 적으나마 느끼고 새삼 바라보게 된다.
사실 1890년에 태어나 1957년까지 살았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나는 부러워하는 것이다. 그 험난하고 앞을 내다 볼 수 없던 끝없는 여정, 나라가 망하고 다시 일어서는 순간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과 무한한 절망을 만나게 되는데 그와 같은 경우는 무려 두 나라 - 조선과 일제 치하의 조선이자 제국 일본 - 의 흥망을 만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무한한 조건 속에서 자기의 삶을 개척해 나갔다. 그 사실 자체가 존경스러운 것이다.
1908년 이후, 그 얼마나 많은 수가 이 시를 보았던 것일까. 그 얼마나 많은 수가 그 마음을 이어받았던 것일까. 그리고 그 얼마나 많은 수를 생각하며, 당시 19세의 청년은 이 시를 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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