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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더듬어.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어"

8월달에듣는 이쪽 수업은 수강생이 별로 없다.

수업 시작하기 10분 전쯤에는 수업 있는 줄 모르고 그냥 자습하러 왔다가

프린트물 나누어 준다거나 칠판 닦는다거나 하는 분위기 보고 '어라라' 하면서 나가는 이들이 몇 명 있다.

수로는 얼마 안 되지만 (학원에서자습을 하는 건 사실 별로 없지 않은가.) 나가는 소리만큼은 '우르르' 이다.

대학교에서는 도서관 자리수도 부족하고,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거의 매일 닫아 놓는 창문 등 답답함이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에

학교 오자마자 도서관에 출석증 '띠~'찍는 일은 하지 않았고,

학기중에는 되도록 빈 시간 나지 않도록 시간표를 짰었고,

어쩔 수 없이 나는 시간은이공대를 가거나 (본관엔 어슬렁족이 좀 될 뿐더러걷는 거리도 얼마 안 된다.)

인촌기념관 앞쪽에서 낮잠을 자거나 (오후엔 피스타치오와 하이트를)

피씨실을 가거나 했었는데,

때로 시험이 가까워지면 그래도 책은 봐야 하므로법대 공강의실을 찾곤 했다.

강의시간표라고 해서 문 앞에 붙여놓은 동그라미는 어찌된 일인지 들어맞는 일이 거의 없었다.

비었다고들어가면 뚜벅뚜벅.. 오늘은 몇 페이지 어디를.. 이라니 바로 챙겨서 나가야 하는 일이 다반사.

같이 나가는 이들 따라 다른 빈 교실 들어가면 거기는 바로 전에 '강의 있음 동그라미' 가 붙어 있어서 지나친 곳.

nomad 족은 이리저리, 어느 정도는 서글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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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적인 공강 시간으로는 아마도 4교시를 들 것이다.

1교시가 9시, 2교시가 10시, 3교시가 11시이니 자연스럽게 4교시는 점심 시간이 된다.

특히 법과 전공 필수 수업은 두 시간 연강이 많기 때문에 2-3, 5-6으로 짜여지는 경우가 많다.

오전 수업 마치고 가방 챙겨서 학관까지 전력으로 걸어가면보통은 학관 외부 계단 정도에서 줄을 선다.

법대 정도면 거리가 멀어서그쪽 학생들은다수경영대 식당을 이용했고,

교우회관 식당이 문을 열었을 때는 그쪽으로 많이 이동한 것으로 안다.

어떻든 간에, 점심 냠냠 먹고 스르륵 경사 타고 올라가면 4교시는 이래저래 마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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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대 - 경북대학교 - 는 지금은 약간 달라졌을지ㅡ모르지만, 유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는데,

하나는 점심시간이 따로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화장실 들어가는 문이 하나라는 것이다. (들어가서 남 녀 가는 길이 달라진다는 것)

이미 오래 전 일이라서 중학교, 고등학교 시간표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때도 점심시간이라고 따로 있지 않았던가?

분명 오전수업은 4교시 까지였었는데.

학원에서도 4교시까지는 하고 점심을 먹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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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학원 종합반 시간표는 고등학교 3학년 시간표와 어떤 면에서는 비슷하다.

워낙 시간이 많이 분배되어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같은 과목에선생이 나누어 들어오는데, 고등학교 때는 국어와 영어까지 그랬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학원에서는 국어, 영어, 수학 모두 그렇게 되어 있었다.

시간표는 촘촘히 적어야 하므로 적을 때는 과목 한 자, 선생 이름에서 한 자를 붙여 준다.

논술을 담당하는 선생은 뭐더라 - 이 선생에 대해서는 생각하면 할수록 떠오르는 게 많아진다. - 선생으로서,

이를테면 '쳇' 자가 들어간다면 '국쳇'으로 적는다.

문학을 담당하는 선생은 전상경으로 이름을 기억하는데, '국경'으로 적었다.

수학을 담당하는 1차 선생은 '용'자가 들어가서 '수용'으로 넣었었고,

2차 선생은 그 유명한 '장택웅'이었는데, '수장'으로 적었었지만, 이 선생은 그 후 반을 옮긴다.

영어를 담당하는 1차 선생은 1반 담임인 '윤일현'이었는데, '영윤'이었는지 '영일' 이었는지, 그냥 '담임'이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지만, 2차 선생의 표기는 기억한다. '영할'이었다.

'영할' 선생은 흰머리 난 할아버지였다. 그렇기에 전통적으로 '할'자를 붙였다고 했다.

박식한 구문 지식으로 수성구 어딘가의 학원 원장이기도 했고,

일신에서는 불과얼마 안 되는반만 시간을 내 주어 가르친다는 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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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오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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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맘때라고 생각하는데,

육선생님은 고등학교 때에도 이 영할 선생 아래에서 영어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영할을 알았었다. 영할도 아마 그런 학생이 있었지라고는 생각했을 것이다.

영할은 수업 중 칠판에 글을 적어 놓고, 어디가 틀렸는지 나와서 고치게 하거나,

한글 문장을 쓰거나 말하고는 나와서 영작을 칠판에 쓰게 하는 것을 곧잘 시키곤 했는데,

순서는 앞쪽에서부터 뒤로 한 줄 주르륵이었다.

그런데절대 여학생은 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줄 이어지다가 여학생 있으면 '그 뒤에 뒤에'로 시켰는데,

4월달 쯤에던가, 그때부터는 그러한 여학생들도 시키는 것으로 바뀌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모모양이 그러한 일을 겪고 난 후 '자존심 상한다. 나도 시켜달라.'라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나의 자리는앞쪽에서 세면 네번째던가 했는데,

나의 앞 두 줄은여학생 그룹이었다.

맨 앞은 비워두는 경우가 많았는데,영할은 절대 스타트를 여학생에서부터 끊지는 않았었다.

나는 그것을 일종의 배려라 생각한다.

맞아서 '잘했어' 라는 말을 듣는 경우보다는 틀려서 쪽팔리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쉬운 문제라면 구태여 앞에 나와쓰고 시간 보내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경을 쓰고, 마이크를 든 영할은, 학생이칠판에 쓰는 것을자세하게, 집중하면서 보고 있다가,

학생이 자리에 앉기 위해 강단을 내려가는 순간에서부터 지적하기 시작했다.

글에 무언가가 틀렸다면, 약간은 엄숙하게, 글 쓴 본인이야 모르겠지만 말을 듣는우리들로서는 조금 재미있게,

'지금 이 글에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어. 어디어디에 ~~었어.' 라는 말을 하면서 수정을 좍좍 하곤 했는데,

정말 뭔가가 중요하다면 써 놓은 글을 계속 노려보다가, 학생이 앉은 연후에야 말을 하곤 했다.

그럴 때면 일순간 상당히 긴장된다. '잘했어', 혹은 '완벽해' 거나, 아니면 '정말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어.' 였기 때문이다.

육선생님은 나의 옆옆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 역시 앞쪽 두줄은 여학생 줄인지라 앞으로 '끌려가' 칠판에 답적을 일은 별로 없었지만,

그 맨 앞자리는 가끔 늦게 온 학생, 신입생, 때때로 마음 잡고 공부하려는학생들이 앉곤 했고,

강단에 선 사람으로서도 몸을 틀었을 때 마이크를 안 든 손으로 자연스럽게 지적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기에,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다.)

위험성이 다분히 높은 지대였다.

육선생님은 자신으로서는 아마도그 해 처음으로 '끌려가지' 않았나 싶다.

문제는 '비행기가 공항을 이륙했다.' 라는, 어찌 보면 무지하게 쉬워 보이는 문장이었는데,

당시 내용과 관련하면 take off 가 들어가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육선생님은 당당하게 'The airplane took off the airport.' 라 썼었다.

(영문장 자체는 정확하게 그 당시와 맞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고,

이 이야기는 육선생님에게 그대로 들은 것이다. 즉 이것은 육선생님 개인적인 엄청난 기억이라는 것이지만,

육선생님은 영어 문장까지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이야기했던 것은 아니다.)

글자도 이쁘게 쓰고 나서 자리에 앉을 때까지, 영할은 문장만 노려 보았고,

육선생님 차후 일대기 동안 잊혀지지 않을 말씀을 토해냈던 것이었다.

'지금 정말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어. 비행기가 옷을 벗었어.'

take off 자체로는 옷을 벗는 것이고,take off from까지 써야 이륙한다는 설명이었다는데,

나로서는 육선생님 말씀 덕분에 지금까지 이륙하는 영작은 잘 할 수 있다는 것만 기억하는 것이지만,

육선생님은 당시 자신이 그토록 쪽팔린 적은 없었다 한다.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잘만 하면 그 당시의 모든 것 - 학생들 개개의 모습이라던가, 에어컨이나 형광등 안정기의 소리라던가, 그리고 물론 영할의 모습까지 포함하여- 이 머리 속에 각인되어 하나의 완벽한 상황으로 보존될지도 모른다.

이번 추석 때는 이 말 다시 한 번 써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