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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더듬어.

12월 2일, 어느 독일어 선생님과 관련하여.

어느 푸근한 날.

고시촌 서점 유리벽에는 하나같이 이번 해 사법고시 합격자 명단이 걸려 있었다.

알아보기 쉽게 가나다 순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 시험친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관심있는 누구든지 가서 공부한다던데... 라고 기억하고 있던 이들의 합격 여부를 알 수 있다.

학원 마치고 나니 여섯시.

길거리는 잘 모르겠지만 월식 식당만큼은 엄청나게 한산했다.

예전부터 월식 식당에 대해서는

'월식 좋아하면 단명한다.'

라는 말이 있었지만, 그것이 돈오점수를 통해 온 사람들에게 한때 일본 원숭이 효과라고떠들었던 것처럼 퍼질 리는 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학원 선생의 말처럼 합격자보다는 불합격자가 확실히 많고,

불합격자는 대개 잠수탄다는 그런 말이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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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 때, 새 독일어 선생이 부임해 왔다.

반백 짧은 머리칼에, 그리 크지 않은 키였고,

부임한 첫 해 3학년을 맡았다.

- 그것은중요하게 여겨진것인지 가볍게 여겨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당시 3학년에게는 그저 수능이 약이었고,

수능에는 독일어는 존재하지 않았으니,

다만 1, 2학년 애들이 2학기 중간고사를, 3학년은기말고사를치는 10월 중순까지

내신의 하나로서만 독일어는 -다른 반에서는 일본어였겠지만 - 가치가 있었고,

그러한 점에서는 미술이나, 음악이나, 체육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단지 하나 기억나는 독일어 수업 시간은,

당시 나와 나의 짝은 창가 쪽 맨 뒤에서 책상 위에는 교과서를, 교과서 아래에는 줄긋기용 다른 책을 펴 놓고 있었고,

나의 앞으로, 대각선 앞으로, 훤하게 뚫린 듯

아이들이 그냥 엎어져서 자고 있던 것만 같은

그러한 상황으로 남겨져 있다.

그렇긴 했지만, 독일어는 다른 이들 - 본고사란 것을 쳐야 하는 이들 - 에게는 다시금 중요한 것이었고,

그런 일 때문에 그 독일어 선생은 과외로 따로 반을 낸 교실에서 독일어 수업을 맡게 되었다.

5월쯤(?) 의 일이었다.

두번째수업시간에,

그는 하나의 기록장을 만들어 보라고 했다.

단순히 문구점에서 맞추어진 공책이 아닌, 이곳 저곳에서 남겨진 여분의 종이를 모아서 묶고,

양쪽으로 든든하게 싸 주고는,

기록장의 이름과 함께, 자신의 이름과 바라는 바, 그리고 뒷장에는 자신의 좌우명 비슷한 글을 하나 적고,

그 뒤에는 달력을 적어 넣고,

그 뒤로는 여러가지 글을 모아 두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의 말에 따라,

이곳 저곳, 특히 1학년 때 한뭉치 사 두었던 모눈이 그려진 공책형연습장에서 종이를 떼 내어

200쪽 가까이 뭉쳐서는 천테이프로 든든히 묶고,

전면 후면은 투명 테이프로 든든하게 싸 놓고는

이름을 나름대로 근사하게 적어 넣었고,

경구에는 중학교 때부터 생각해 담아 온 나만의 글, '너무 알면 굶어 죽는다.' 를

그 선생이 예시로 언급하였던, 자신의 기록장에 담아 두었던 글 - 행동은 너를 더럽히지 않는다. - 과 함께 적어 넣었다.

수업은 통독 독일어란 - 이름은 확실하지 않지만 - 교재로 진행된다고 했다.

지금은 절판되었을 것이지만, 그 책은엄청난 난이도의 교재였고,

그와 함께 10대에겐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다가올 황태자의 첫사랑이 독해 문장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수업이 제대로 진행된 기억은 없다.

다만, 정관사를 외우는 방법이 der des dem den 에서 der die das die 로 바뀐 것은 기억난다.

그리고 수업이 진행되지 않은 기억이라고 해서, 그 수업이 가치 없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언젠가,

기록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그 선생은 다른 경구를 더해 주었다.

'떨어져도 힘을 잃지 마라.'

그 때의 제 2건물 3학년 12반의 깔끔한 교실,

비쳐드는 햇살, 수능 다음의 너무나 창백하여 조용함 가득한 바닥, 그런 모습들이

바깥의 소리칠 듯 가득한 등가대의 나무들 여름 이미지와 어우러져 기억되고 있다.

그리하여 나에게는 세 가지 경구가 지금도 메아리쳐 있는 것이었다.

과연 기필코라는 생각으로 던져넣었던 길에서 실패가 있을 때,

실패가 있을지라도 힘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를,

간단히는 실패가 있을 때 나 자신이 생각하는 실패는 진정한 실패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기에 나 자신을 잃고 허둥댈 때 더욱 큰 실패가 있을 수 있음을,

나아가서는 전 이미지에 어느 성공실패는 다만 통과하는 별 가치없는 것이기도 함을,

그리고 더하여서는, 이정도의 생각하는 것 외에도 나로서는 범접하지 못한 단계의 무언가가 있음을

약간이나마 감지하기에 그 어떠한 것에도 겸허히 있어 주기를

마음 속은 항상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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